<운흥사지와 운흥동천>
이때 이 절의 목판 및 유물들은 통도사로 옮겨졌다고 한다.
몇 만 석씩 추수하던 많은 농토는 일부 남아 있어 내원사에서 관리하고 있고 지금은 2만여평의 절터가 잡초와 수목으로
뒤덮이고 주변은 개발이라는 명분으로 마구 파헤쳐지고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정족산은 이렇게 유서깊은 운흥사지 외에도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재우 선생이 수도하던 곳이기도 하다. 웅장한 산세는
아니지만 역사의 숨결을 느끼게 하는 산세는 밋밋한 육산이지만 산록을 파고드는 골짜기들은 사철 수정같이 맑은 물이
흘러내려 동으로 깊은 계곡을 만들어 운흥동천을 흐르게 하고 남서쪽으로는 상리천의 원류가 되는 안적암 골짜기를 파
놓고 있다.
계곡은 울창한 수목으로 뒤덮여 비경을 간직한채 여름에도 한기를 느낄 정도다.
계곡 옆의 큰바위에는 울산부사 홍상빈이 썼다는 운흥동천(雲興洞天)의 글씨가 음각돼 있다.
주변에는 폭포와 더불어 암반이 깔려있고 전설어린 선자(扇子:부채선)바위가 우뚝 서 있다.
계곡을 거슬러 오르면 곳곳에 기와조각,토기조각과 부도가 방치되어 있다. 기록에 따르면 계곡의 중간 중간에 환학교,세진교,
청하교,취적대,유봉대 등이 있었다고 한다. 또 천왕문 밖에는 수각(水閣:물위의 정각)도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 조차 찾을
수 없다. 건물을 세웠던 축대가 1천여 년의 세월을 지탱하면서 원상태로 일부 남아 있다.
<운흥사의 보물>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시신을 화장한 후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 운흥사터에는 모두 7기의 부도가
있는데, 현재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금당터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2기의 부도이다.
크기만 서로 다를 뿐 거의 양식이 같아서, 바닥돌 위로 2단의 기단(基壇)을 놓고 그 위로 종모양의 탑몸돌을 얹은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각각 꽃무늬, 구름무늬 등을 옆면에 새겼으며, 위층 기단은 밑면에 굵은 연꽃무늬를 둘러놓았다. 탑몸돌
위에는 꽃봉오리 모양의 머리장식이 조그맣게 돌출되어 있다.
조선시대 부도로서 작은 규모에 간결하면서도 소박한 멋이 흐른다. 지금은 관음사(觀音寺)라는 작은 암자에서 이들을 보존,
관리하고 있다.
이 부도는 운흥곡(雲興谷)의 운흥사지에 있었던 것으로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석종형(石鐘形) 부도가 3기인데 2기는
완전하며 1기는 붕괴되었다.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일반형 석조부도(石造浮屠)로서 연화대좌(蓮花臺座) 위에 올렸다. 높이는
2m 정도이고 직경은 60㎝ 내외이다.
지금은 관음사(觀音寺)라는 조그마한 암자(庵子)에서 보존관리하고 있다.
<반계마을>
주도로 입구 용당에서 반계마을 까지는 걸어서 2시간 정도이며 90세이상의 노인이 많은 장수촌으로 알려져 있다.최재우
선생의 처가인 이곳에서 행상인으로 10년간 살았다고 한다.
반계마을에는 각성받이(배다른 형제)가 많이 살았다. 동학혁명때 기병했던 사람들이 혁명에 실패하자 이골짜기로 숨어들어
정착하게 된것이 아님가 싶다. 그래서 성(姓)이 조두 다른 것이 여느 집성촌과는 대별되는 점이다.
마을 오른편을 돌면 수령 500년이 넘은 떡갈나무 한그루가 세월의 흐름에도 아랑 곳없이 모진 풍상을 겪으며 가지를 느러뜨
리고 있다. 보호수로 지정된 이 고목은 19m높이에 둘레가 3.7m나 된다.
<문헌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운흥사는 원적산에 있다(雲興寺在圓寂山)'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정족산도
천성산,원효산과 더불어 원적산으로 총칭되었던 것 같다.
이 산의 남동쪽 반계계곡에는 수풀에 묻혀 가려진 운흥사지(雲興寺址)가 있다.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흔적만
으로도 거대했던 규모를 짐작 할 수 있다.
<삼국유사> <흥려지>등에 따르면 신라26대 진평왕 을축년에 창건 고려말 3대 화상중 한분인 인도사람 지공화상이 중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지공화상은 공민왕께 국가를 부흥시키고 왜를 진압하기 위해 이곳에 운흥사를 중건 할 것을 건의하게 된다.
결국 왕의 윤허를 받아 중건된 운흥사는 원찰(願刹)로서 조선조 영조 때까지 상당히 번창하여 영남일원의 사찰중 제일 컸다고
전한다.
그때는 5방(房)이 있었는데 각 방마다 돌수조가 있었으며 크기가 지금의 학교 교실정도 규모였다니 놀라울 뿐이다. 이렇게
큰사찰이다 보니 자연 수도하는 스님들도 많아 한때는 1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운흥사는 호국보다는 학문을 중요시했던 절이 아닌가 싶다. 그 증거로 지금도 간혹 고서나 장경(藏經)끝장에 운흥사간
(刊)이라 적혀 있다.
또 절터 안에 있는 '판전지고'라는 곳은 목판을 만들어 책을 출간하고 그 목판을 보관 하던 곳이라고 한다. 특히 목판각은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제외 하고는 제이 컸다고 하니 인쇄매체를 확보할 정도의 이절은 대찰(大刹)이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운흥사는 왜 폐사되었을까?>
거찰이었던 운흥사의 폐사에 대해 의문의 실체를 밝히고 운흥사지를 보존하기 위해 운흥사란 조그만 암자를 짓고 수도하는
야은(野隱)스님은 "한마디로 운흥사의 폐사는 정치적 이유로 말미암은 수난이라고 생각된다. 조선조말의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조정은 천주교에 곁들여 서양문물이 들어오자 그것을 사학(邪學)으로 몰아 탄압하고 결국에는 쇄국의 길을 택하고
있었다.
내적으로는 탐관오리의 횡포와 조정대신들의 권력 다툼이 일고 백성들은 재난과 질병 기근으로 절망적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여기에 더해 조대비(趙大妃)의 섭정으로 우유부단한 조정과 문란한 사회 질서에 백성들의 원성은 날이 갈 수록 더해진다.
그래서 사찰은 은거지로 한 민란이 도처에서 일어나는데 고종16년(1879)4월 울산에 큰 민란이 일어난다. 당시 수렴청정 하던
조대비는 전국의 63개 사찰에 불을 질러 폐사케 했다. 이때 운흥사도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고 조심스레 말한다.